초소의 저녁은 맑은 국 한 솥이었다. 단이 물을 길어 오고 이든이 말린 곡식의 남은 양을 봤다. 쇠마루에서 줄어든 보수를 떠올리자 두 그릇째를 청하기 어려웠다. 기주는 손바닥에 새 천을 감은 채 국을 나누었고, 열이 나는 아이의 가족에게 먼저 건넸다. 라온은 그들이 숟가락을 든 동안 이동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물건 하나를 얻어 돌아갈 사람과 여기서 내일도 종을 울릴 사람이 같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누리는 국을 얇게 끓인 이유를 숨기지 않았다. “바람목에서 내려오는 이번 달 마지막 정기 식량 수레가 내일 닿으면 다시 걸쭉하게 만들 수 있어요.” 높은 길은 그 수레가 지나간 뒤 지지대 수리로 며칠 닫힐 예정이었다. 아직 겨울 첫눈까지는 수 주가 남았지만, 다음 배급이 올 때까지의 그릇은 오늘의 수레에 달려 있었다. 이든은 더 덜어 달라는 말을 삼켰다. 도윤은 그릇 밑에 남은 콩 두 알을 숟가락으로 모아 열나는 아이의 형에게 밀었다. 형은 하나만 먹고 하나를 도윤에게 되돌렸다.
식사 뒤 운반인은 기주의 말을 글로 남기려면 누리와 마을 대표에게 보여야 한다고 했다. “집 이름이 들어가면 높은 집 사람들은 다시 길을 숨길 겁니다.” 라온은 출처를 분명히 하고 싶은 마음에 집 세 곳의 표시까지 옮겨 적고 있었다. 누리가 전날 자신에게 허락한 것은 날짜와 구조 사실뿐이었다. 그는 그 종이를 접지 않고 잘못 쓴 줄을 그어 지웠다. 없던 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어떤 정보를 뺐는지도 여백에 적었다.
그때 전날 높은 집에서 내려온 어머니가 문 앞에 섰다. 아이는 그녀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 집이 어느 길에 있는지 적었어요?” 라온은 방금 그은 선이 보이는 종이를 펼쳐 보였다. 어머니는 선을 한참 보더니 “그 길은 비가 오면 다시 무너집니다. 누가 그 글만 믿고 올라가면 어떡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집 위치가 외부 사본에 남으면 자기 구조 사실에도 확인 표시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라온은 구조를 도운 사실로 그 걱정을 누를 수 없었다. 단이 종이를 받아 위험한 굽이에 오늘 날짜를 적고, 외부에 전할 사본에서는 집 위치를 뺐다. 어머니가 자기 눈으로 두 장을 비교한 뒤에야 아이의 손을 놓았다.
“이름을 빼면 누가 믿어?” 도윤이 물었다. “온새미에서는 이름이 빠진 장부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잖아.”
“여기 사람들의 집을 남의 장부에 올리는 것도 같은 일이 될 수 있어.” 모아가 말했다.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기주의 이동표를 봤다. “표의 날짜와 기주가 직접 본 것을 쓰면 돼. 집을 특정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 어디 있었는지는 확인돼.”
라온은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들었다. 도윤의 화가 자신의 것과 닮아 불편했다. 모아의 말도 쉬운 해결은 아니었다. 기주가 직접 들은 문장을 증명할 사람은 창구의 그 직원뿐이었다. 라온은 종이를 두 장으로 나눴다. 첫 장에는 누리가 볼 수 있는 도착 날짜와 종 신호, 기주의 실제 근무를 적었다. 둘째에는 기주가 인력소 창구에서 들은 ‘대체 인력이 온새미에 간다’는 말과 그 직원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적었다. ‘확인된 인력 배치’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도윤은 그걸 보고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원본을 들고 가면 한 번에 믿을 텐데.” 모아가 기주의 갈라진 손바닥을 가리켰다. “내일 그 표가 없다고 배급을 못 받으면 누가 대신해?” 도윤은 대꾸하지 않고 지도 두 장을 꺼내 이든에게 주었다. 아까 국을 두 그릇 먹지 않은 돈보다, 남은 종이의 값이 더 컸다. 이든은 수리공에게 배운 대로 지출 칸을 적으려다 멈췄다. 대신 지도 한 장의 빈 뒷면에 기주의 말을 베껴 썼다. 계산은 돌아가서 해도 되지만, 말한 자리와 순서는 지금 기억해야 했다.
기주는 두 장을 읽고 첫 장의 시간을 고쳤다. 라온은 기억하던 저녁을 ‘해 지기 전’이라고 적었지만 누리의 표시는 ‘두 번째 종 뒤’였다. 날짜는 같아도 정확한 시각은 달랐다. 기주는 종을 두 번째 울릴 때 북쪽의 한 집에서 연기가 오르는 걸 보았다고 했다. 시온은 그 집의 위치를 묻지 않았다. 시간과 사람을 함께 기록하되, 외부에 내놓을 위치는 남기지 않는 편이 좋았다.
종이 울릴 차례가 오자 누리가 마을에서 올라왔다. 기주가 나란히 울리는 동안 누리는 라온이 쓴 문장을 큰 소리로 읽었다. 기주가 들은 말은 들은 말로, 본 표와 울린 종은 본 일로 구분되어 있었다. 누리는 자기 마을의 접수책을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그 날짜에 자기가 초소의 답종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허락하는 문장 아래에 표시했다. 라온은 원본을 요구하지 않았다. 복사할 종이는 이든이 가진 예비 지도 두 장이었다. 새 지도를 못 그릴 수 있는 비용을 알고 내놓았다.
“그 표를 들고 서쪽에 가면 바로 답을 받겠지?” 단이 물었다. 운반인은 고개를 저었다. “서쪽 창고 원표는 물건의 길을 말해 줄 겁니다. 사람의 길은 인력소에서 따로 물어야 해요.” 라온은 두 장소를 지도에 표시했다. 원표를 하나 열면 모든 이름이 나올 것처럼 생각했던 어제보다 길이 길어졌다. 그는 그 선을 가리지 않았다.
밤에는 기주가 한 번 쉬고 누리가 종을 대신 잡았다. 모아는 누리가 대단하다고 했다. 누리는 웃으며 “종을 대신 칠 수는 있어요. 어제 그 집에서 어머니가 아이 손을 잡은 일까지 대신한 건 아니죠”라고 했다. 라온은 서린에게 쓸 편지 첫머리에 ‘답을 얻었다’가 아니라 ‘누가 여기 있었는지는 확인했다’고 적었다. 그 차이를 쓰는 동안 또 하루가 지나갔다.
어머니는 돌아가면서 라온의 두 장 중 밖에 보여 줄 장에 자기 손으로 작은 점을 찍었다. 이름 대신 그 점을 남겨도 되냐고 라온이 묻자, 그녀는 “내가 읽고 봤다는 뜻만요. 우리 집에 찾아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라고 했다. 라온은 점 옆에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아이는 도윤의 말판을 보고 다시 이겼다고 주장했다. 도윤은 이번에는 “길을 먼저 찾은 쪽이 이기는 규칙이었지”라고 받아쳤다. 국솥이 비는 동안에도 이 마을의 하루는 조사 문장 밖에서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