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리 깃발은 바람이 불 때만 보였다. 바람목의 돌기둥에 묶인 천이 접히면 그 아래 스물여섯 사람도 길에서 사라진 듯했다. 라온은 깃발보다 먼저 아이의 울음을 들었다. 큰 짐 사이에 앉은 아이가 맨손으로 마른 곡식 한 줌을 쥐고 있었다. 어른이 손을 씻고 먹으라 하자 아이는 흙 묻은 손을 숨겼다. 식량을 나르는 행렬인데 따뜻한 한 끼는 없었다.
회색깃 대장 류건은 일곱에게 인사를 생략했다. “낮은 길로 먼저 내려보낼 사람이 스물여섯입니다. 주민 스물, 운송과 호위 여섯. 내 사람까지 셈에 넣었어요.” 그는 라온이 바람목 아래서 만난 앞 수레 두 사람의 안부를 확인한 뒤에야 말을 이었다. “뒤쪽 수리공 셋과 가족 넷은 높은 길 끝에 남았습니다. 현장에 지금도 일곱인지 확인할 사람이 필요해요. 하지만 본대를 여기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류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민 하나가 자기 자루를 수레 위로 밀어 올렸다. 안에는 마른 콩보다 오래된 금속 냄비가 많았다. “집에 남은 건 이거뿐인데.” 류건은 자루를 던지지 않았다. 바퀴가 돌 때 어디에 두면 빠지지 않을지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의 호위는 주민의 이름보다 짐의 무게를 먼저 물어야 하는 일이 미안한 듯 입을 다물었다. 라온은 숫자 스물여섯이 사람의 마음을 다 담지는 못한다는 걸 보았다. 그래도 지금은 그 숫자가 빠지면 누가 남았는지조차 모른다.
라온은 서린의 쪽지를 잡은 손으로 지도를 폈다. 낮은 길은 갈림길부터 굽어 보이지 않았다. “일곱을 놔두고 내려가면 그 사람들이 이쪽 종을 못 듣습니다.”
“스물여섯을 여기 세워 두면 낮은 길까지 못 갑니다.” 류건은 자기 뒤의 행렬을 가리켰다. 피난민 하나가 바퀴살을 밟고 넘어질 뻔하자 회색깃 병사가 짐을 내리고 발을 받쳤다. 대장의 말은 도망갈 구실이 아니었다. 라온은 기주가 물통에 답해 준 종을 떠올렸다. 같은 소리가 길 위 모두에게 같은 거리에서 들리지는 않았다.
라온은 “그럼 언제 뒤를 보낼 겁니까?”라고 재촉했다. 류건은 주민들의 발을 보고 답했다. “낮은 길 첫 굽이가 비면.” 그 말이 무심해 들려 라온이 더 묻자 류건은 먼저 내려간 사람의 흰 천을 보여 줬다. 앞사람이 안전하게 다음 돌에 서지 못하면 뒤사람을 움직이지 않는다. 라온은 그 규칙이 느리게 보이다가 첫 수레가 한 번만 흔들려도 모두 멈춰야 함을 알았다. 둘의 속도가 달라도 사람을 세는 이유는 같았다.
단은 류건과 말하는 동안 높은 쪽을 한 번 다녀왔다. 첫 굽이 뒤에는 수리 난간이 있고, 거기서 더 가면 돌아올 길이 좁아진다고 했다. 그는 서두르다 발이 미끄러진 자리의 모래를 바지에 묻힌 채였다. “저기까지만 다녀왔어. 더 안쪽은 못 봤어.” 시온은 능선의 색을 보며 높은 쪽에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있다고 했다. “일곱인지 세어지지 않아.” 서로 모르는 범위가 다른 두 관찰이었다.
류건은 낮은 길에 호위와 운송자 둘을 먼저 보냈다. 그들이 손바닥만 한 흰 천을 흔들면 첫 수레가 내려간다. 류건 자신과 남은 셋은 끝까지 본대와 간다. 라온은 일곱이 뒤쪽으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류건이 반박했다. “저쪽은 수리용 승강 발판을 써야 해요. 오늘 붙든 사람을 내일 다른 데서 잃지 마세요.”
“그 사람들을 안 보고 내려가라는 말도 못 듣겠습니다.” 라온이 대답했다. 둘은 서로를 설득하지 못했다. 대신 물통 신호를 맞췄다. 일곱이 높은 굽이에서 세 번 두드리면 일곱 사람을 확인했다는 뜻, 두 번이면 돌아갈 길이 막혔다는 뜻이다. 류건은 답을 못 들으면 본대부터 아래로 보내고 다른 길의 사람을 모으겠다고 했다. 라온은 그 조건을 적어 두었다. 그들이 무사할 때까지 스물여섯을 붙들겠다는 약속을 류건에게 요구할 수 없었다.
낮은 길의 첫 수레가 움직일 때 그림자 같은 것이 돌기둥 아래를 스쳤다. 도윤이 망치를 들었고 이든은 총구를 낮게 두었다. 시온이 손으로 막았다. “저건 깃발이 흔들려 생긴 그늘이야.” 곧 바람이 멎자 그늘도 사라졌다. 다른 곳에서 다시 보이는 검은 흔적은 그대로 남았다. 라온은 먼저 사람의 발이 가는 방향을 보았다. 아이를 태운 수레는 류건의 호위 아래 낮은 길 첫 굽이를 넘었다. 스물여섯의 전부가 내려간 것은 아니지만, 첫 가족은 깃발 자리에서 멀어졌다.
수레의 뒷바퀴가 굽이 돌에 걸리자 아이가 품은 곡식을 놓쳤다. 손바닥의 알갱이가 진흙으로 흩어졌다. 아이는 울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고, 류건은 수레를 더 끌기 전에 자기 몫의 마른 빵을 반으로 부러뜨려 건넸다. 식량을 잃은 아이를 위로하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빵을 받자 호위가 다시 수레를 밀었다. 라온은 류건을 부르려던 목소리를 낮췄다. 뒤에 남은 일곱을 위한 다툼을 끝낸 건 아니지만, 이 사람도 지금 누군가의 하루를 붙들고 있었다.
일곱은 높은 길로 올라갔다. 단은 돌아올 돌 세 개를 골랐고, 시온은 깃발이 보이지 않는 지점부터 손짓 대신 물통을 쓰자고 했다. 모아는 다친 어깨에 방패를 오래 매지 않고 라온과 교대로 들었다. 해나는 붕대와 남은 물을 세었다. 이든은 일반탄 열 발을 따로 확인하고 탄창의 잠금만 눌렀다. 누구도 그 숫자가 뒤쪽의 일곱을 대신해 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째 굽이에서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명은 수리공이었고, 다른 둘은 무거운 받침을 놓을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단은 바위 위에 올라 얼굴을 확인했다. 더 뒤에서는 아이 둘과 어른 둘이 좁은 난간에 앉아 있었다. 수리공 셋, 가족 넷. 지금도 일곱이었다. 그는 내려와 물통을 세 번 쳤다. 낮은 길에서 류건의 짧은 쇳소리가 답했다. 숫자가 맞았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두 대열 사이를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