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물 때 온새미가 나타났다. 마을은 하얀 안개 속에 잠겨 있었지만 빈 마을은 아니었다. 굴뚝에서 얇은 연기가 올라왔고, 우물 옆에는 물동이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창 안쪽에서 입술만 움직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종탑으로 올라간 일행을 맞은 사람은 서린이었다.
라온은 누나를 알아보는 데 한순간이 걸렸다. 사흘 만에 머리카락 한쪽이 새하얘져 있었다.
“돌아가.” 서린이 말했다.
“마을을 데리러 왔어.”
“그러니까 돌아가.”
종탑 가운데에는 거대한 구리종이 매달려 있었다. 종의 안쪽에 검은 덩어리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짐승이 아니라 여러 길의 그림자가 하나로 꼬인 것이었다. 종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는 마을 밖의 길을 찾으려 더 길게 뻗었다.
서린은 종줄을 끊어 놓았다. 이 세계의 종은 길을 붙든다. 마을의 종이 사흘 동안 울리지 않으면 길은 지도와 기억에서 흐려진다. 그러나 그림자도 길을 들을 수 있었다. 서린은 놈이 남쪽 도시로 향할까 봐 온새미 전체를 침묵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해나가 물었다.
“살아 있어. 종이 다시 울리면 모두 나갈 수 있어.” 서린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때 저것도 나가겠지.”
도윤이 종 위의 검은 것을 살폈다. “그럼 먼저 부수면 되잖아.”
“종이 부서지면 온새미로 돌아오는 길도 사라져.” 서린이 말했다.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은 집을 잃어.”
누구도 쉬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든이 탑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을 서쪽에는 오래된 물길이 있었다. 종의 길이 생기기 전, 사람들이 돌을 깔아 강을 건너던 낮은 둑이었다. 지금은 안개가 가득했지만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종을 한 번만 울려.” 이든이 말했다. “사람들이 둑을 찾을 동안.”
“한 번이면 놈도 깨어나.”
“우리가 여기 있으니까.”
서린은 일곱의 얼굴을 차례로 봤다. 방패를 멘 모아의 어깨는 이미 젖어 있었고, 도윤은 아직 숨을 고르고 있었다. 라온의 손목은 퉁퉁 부었다. 첫 전직을 끝낸 지 하루도 안 된 사람들이었다.
“왜 너희야?”
라온은 대답을 찾다가 편지를 내밀었다. 이제 종이에는 서린의 이름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가 충분한지 몰라. 그런데 이걸 보내고 기다린 사람이 여기 있어.”
서린은 편지를 오래 바라봤다. 마침내 종 옆의 작은 쇠망치를 들었다.
“한 번이다. 내가 한 번 울리고, 모두 서쪽 둑으로 보낼게.”
“그다음엔?” 모아가 물었다.
서린이 종 아래의 깊은 골을 가리켰다. 겨울마다 물이 빠지면 마을 사람들이 건너던 협곡이었다. 종을 붙든 굵은 쇠핀이 뽑히면 구리종은 골 아래로 떨어진다. 그림자도 그 안에 붙어 있다면 함께 떨어질 수 있었다.
시온이 핀을 올려다봤다. “내가 맞힐 수 있어.”
“핀까지 길이 열려야 해.” 라온은 검은 덩어리의 한가운데를 보았다. “그건 내가 할게.”
시온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대답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온 뒤에도 일행은 종탑의 문을 닫지 못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쇳덩이를 건드릴 때마다, 종은 울리지 않고 낮게 떨렸다. 서린은 망치가 걸린 자리를 다시 확인했다. 핀 하나만 빼면 종을 울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소리를 들으면 길을 잃은 사람들이 돌아올 수도 있었다. 동시에 그림자도 종소리를 따라올 수 있었다.
“사람을 부르자는 말이 틀린 건 아니야.” 라온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울리면 어디로 부르는지 알 수 없어.”
“안 울리면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가 포기한 줄 알 거예요.” 서린은 망치를 쥔 손을 내려놓았다. “내가 수리 요청을 한 이유도 그거였어. 종이 늦게 울리면 누군가 먼저 와 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모아는 핀을 빼는 대신 문을 받쳤다. “오늘은 이 문을 열어 두고, 사람을 먼저 데려가자. 그다음에 다시 생각해.”
그 말에 누구도 안도하지 않았다. 선택을 미룬 것이 아니라, 울리지 않은 소리의 책임을 함께 지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시온은 종탑의 균열과 계단 수를 적었고, 이든은 출구마다 몇 사람이 동시에 빠져나갈 수 있는지 셌다. 서린은 요청서의 마지막 빈칸에 ‘오늘은 종을 울리지 않음’이라고 썼다. 자기 이름도 옆에 남겼다.
시온은 종의 울림을 기록하는 쪽지를 서린에게 건넸다. 음이 몇 번 떨렸고, 어느 방향으로 번졌는지 적어 두었지만 결론은 없었다. 라온은 “누군가 들었을까?”라고 물었다.
“들었는지는 몰라. 들었다고 해도 우리가 원하는 곳에 있다는 뜻은 아니야.”
그는 질문을 더 하지 않았다. 한 번 울리면 답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그들에게 필요했지만, 기대를 사실처럼 적을 수는 없었다. 서린은 종 수리 요청서의 복사 제한을 떠올렸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요청을 했다는 기억과 종이 늦게 울렸다는 결과뿐이었다.
해나는 남은 치료수를 작은 병에 나누어 담았다. “오늘 누굴 먼저 살릴지 정하는 데 쓰지 말고, 꼭 필요할 때 쓰자.”
“누가 꼭 필요한지 정해?” 모아가 물었다.
“당사자가 말할 수 있으면 당사자에게 먼저 물어.”
모아는 방패 손잡이를 바라봤다. 아직 자기 차례에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일행은 계단 밖으로 나가며 다음 선택을 미리 약속하지 않았다. 오늘의 결정을 다른 날의 명령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날의 결론은 종을 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서린은 망치와 핀을 버리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판단하려면 고장 난 부분이 어디인지 알아야 했다. 라온은 사람을 데려가는 길과 종을 되살리는 일을 별도 목록에 적었다. 하나를 택했다고 다른 하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린은 종의 쇠핀에 붉은 실을 묶어 두었다. 수리할 때 움직이지 않도록 한 표시였다. 지금은 손을 대지 않기로 했지만, 누가 언제 다시 확인할지는 정해야 했다. 그녀가 그 일을 맡고, 라온은 망치가 필요한 순간을 주민들에게 설명하겠다고 했다. 멈춤도 기록과 책임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