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부터 새벽까지 종은 울리지 않았다. 서린은 전날 적은 ‘오늘은 종을 울리지 않음’을 지우지 않았다. 판단을 바꿔야 한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먼저 남기기로 했다.
새벽이 가까워지자 서쪽 둑의 낮은 돌 세 개가 안개에 차례로 잠겼다. 둑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지만, 마을에서 내려가는 길의 윤곽이 집집마다 다르게 보였다. 말소리는 여전히 안개를 건너지 못했다. 집 안에서 서로를 부를 수 있어도, 골목 끝의 사람에게는 닿지 않았다.
서린은 라온과 함께 문판을 들고 골목을 돌았다. ‘한 번 울리면 서쪽 둑으로 모인다. 종소리는 그림자도 깨울 수 있다. 지금 나가겠는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천천히 다시 읽어 주고, 대답할 때까지 기다렸다. 종을 안전하다고 믿는다는 표시는 없었다. 자기 발로 서쪽 둑으로 가겠다는 사람만 문틀에 흰 천을 걸었다. 아이들은 보호자와 함께 표시했고, 망설이는 집에는 빈 천을 억지로 걸지 않았다.
마지막 골목에는 아직 흰 천이 걸리지 않은 집이 하나 있었다. 문판을 들고 간 서린에게 안쪽 사람은 다친 다리를 가리킨 뒤 짧은 글을 써 보였다. ‘둑 계단을 혼자 내려갈 수 없다.’ 서린은 곧바로 업겠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양옆에서 난간을 받쳐 드려도 될까요? 손을 잡는 건 먼저 물을게요.” 그 사람은 자신이 멈추자고 하면 모두 멈출 수 있는지 되물었다. 라온은 어느 집이 먼저 갈지 정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출구 순서를 양보하라고 요구받지 않았다. 두 이웃이 가까이에서 걷고, 몸을 받치는 건 요청을 받은 때만 하기로 했다. 그제야 그 집에 흰 천이 걸렸다. 종의 위험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기 발로 나가겠다는 선택이었다. 라온은 종이 울리지 않으면 둑이 더 흐려져 길을 찾으러 나선 사람끼리도 갈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번 울리면 길을 보여 줄 수 있지만, 탑 안의 그림자도 풀릴 것이다.
“어제는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 서린이 말했다. “이제 기다리는 동안 나갈 길이 사라질 수 있어. 사람들에게 위험을 말했고, 나갈 뜻도 물었어. 이번엔 내가 한 번 울릴게.”
모아는 한 번의 울림이 사람마다 다른 방향을 가리키면 어쩌냐고 물었다. 서린은 모두를 안전하게 건네 주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답했다. 종은 길을 보여 줄 뿐, 위험을 없애지는 못했다. 서린은 그 조건을 문판에서 지우지 않았다.
라온은 서린에게 결정을 넘기지 않았다. 일곱 모두 종탑 계단을 지키고 주민들이 둑에 닿을 때까지 그림자를 붙들겠다고 답했다.
모아는 방패끈에서 청환을 꺼냈다. “어깨는 그대로 아파. 그래도 오늘 방패를 드는 각도는 내가 고를게.” 그녀가 환을 삼키자 차가운 것이 혀끝에서 녹았다. 손목의 방어 인장에 가느다란 푸른 획이 하나 늘었다. 방패 테두리의 어느 곳에 힘이 몰리는지가 전보다 선명했다. 팔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모아는 손잡이를 고쳐 쥐고, 오래 버티려는 대신 단이 지나갈 한 걸음만 지키기로 했다.
서린은 문판의 선택 표시를 한 번 더 읽고, 흰 천을 건 주민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 작은 망치로 종을 쳤다.
종소리는 아름답지 않았다. 아주 오래 참은 사람이 처음 숨을 토해 내는 소리 같았다.
마을의 창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서린의 목소리를 따라 서쪽으로 뛰었다. 아이 하나가 우물 앞에서 멈춰 서자 해나가 내려가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종 안의 그림자가 열렸다.
표지짐승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였다. 길을 잃은 사람들의 발자국, 찢긴 지도, 닿지 못한 편지들이 검은 비늘 사이에 박혀 있었다. 그림자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려 하자 이든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 또 한 발. 짧은 총이 내는 일정한 소리가 그림자의 방향을 탑 안쪽에 묶어 두었다.
“탄 여섯 발!” 이든이 외쳤다. “그 뒤엔 장전해야 해!”
도윤이 파워를 켰다. 첫 칼이 탑 기둥을 타고 내려온 비늘을 눌렀다. 둘째 칼이 같은 자리를 쪼갰다. 셋째 칼이 갑옷 같은 겉껍질을 벌렸다. 도윤은 그대로 등을 벽에 기댔다. 이번에도 넷째 칼은 없었다.
단은 그 열린 자리를 향해 뛰었다. 왼발로 계단을 밟고 오른발로 그림자의 옆면을 찼다. 덩치가 너무 커서 밀려나지는 않았다. 대신 놈의 몸이 아주 잠깐 기울었다. 단은 착지하며 미끄러졌다. 검은 것이 그에게 떨어졌다.
모아가 방패를 정면으로 들이밀려다 반 뼘 틀었다. 환을 먹고 선명해진 것은 더 큰 힘이 아니라 충격이 흘러갈 각도였다. 그림자의 낙하가 단의 몸을 비켜 옆 계단을 쳤다. 그래도 무게 일부가 방패를 지나 다친 어깨까지 올라왔다. 모아는 비명을 삼켰다.
“라온. 난 오래 못 버텨.”
“알아.”
라온은 그림자 속의 가느다란 중심을 찾았다. 지금 칼을 들면 두 박자 후에 닿는다. 두 박자 동안 모아가 버텨야 한다. 그가 망설이자 모아가 손바닥으로 방패를 두드렸다.
“아까 한 말, 기억해. 잠깐은 맡겨.”
라온은 숨을 들이켰다. 하나.
아래쪽에서 아이가 울었다. 해나가 아이를 서린에게 넘기고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그녀는 모아의 피 묻은 어깨와, 종을 붙든 검은 실을 번갈아 봤다. 한 번 더 회복시킬 만큼의 생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절단 한 번이면 종을 놓아주지 않는 실 하나를 끊을 수 있었다.
“모아, 미안해.”
“지금은 종을 봐.”
해나의 손끝에서 녹색 선이 뻗었다. 깊지도 넓지도 않은, 정확히 같은 만큼의 상처가 검은 실에 생겼다. 거대한 몸을 쓰러뜨리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그러나 종을 잡은 손가락 하나를 놓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둘.
이든의 마지막 탄이 비늘을 튕겼다. 그녀가 탄창을 빼는 짧은 침묵 동안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시온은 총을 쏘지 않았다. 핀까지 사선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먼저 쏘면 희귀한 관통탄 하나를 잃는다. 기다리면 아래쪽 사람에게 놈이 닿을 수도 있다.
단이 모아의 방패를 짚고 다시 뛰었다. 두 번째 발차기가 그림자의 턱을 위로 올렸다. 도윤은 숨이 돌아오기도 전에 몸으로 갈라진 비늘을 벌렸다.
“지금!” 시온이 외쳤다.
라온의 칼이 중심의 매듭을 베었다. 같은 순간 시온의 긴 총이 울렸다. 관통탄이 열린 사선을 지나 종의 쇠핀에 박혔다.
구리종이 떨어졌다.
종소리가 한 번 더 날 뻔했다. 서린이 맨손으로 종의 가장자리를 밀어 탑 벽에서 떼어 냈다. 손바닥이 찢어졌지만 종은 조용히 협곡으로 미끄러졌다. 검은 그림자는 종 안쪽에 매달린 채 함께 내려갔다. 아래에서 땅이 크게 울렸다. 소리는 아니었다.
그날 밤 온새미 사람들은 서쪽 둑을 건넜다. 종이 없는 마을로 돌아갈 길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서린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라온의 손을 잡았다.
“내가 보낸 편지, 읽었어?”
라온이 접은 종이를 펼쳤다. 이제 글자는 하나도 없었다.
“읽었어.” 그는 누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서린. 서린.”
누나는 울다가 웃었다.
남쪽 도시의 조합장은 다음 날 지도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종이에는 여전히 온새미가 없었다. 그는 빈자리에 새 도로를 그려 넣으려 했지만, 라온이 먼저 펜을 들었다.
“길은 나중에 찾으면 돼요. 지금은 사람이 왔다고 적어요.”
그는 지도 여백에 이렇게 썼다.
온새미에서 온 사람들, 서른두 명.
모아의 어깨는 한동안 낫지 않을 것이다. 시온에게는 관통탄이 남지 않았다. 해나는 절단이 언제나 답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고, 도윤은 파워의 셋째 타격 뒤에도 싸움이 이어진다는 걸 배웠다. 이든은 빈 탄창을 채우며 서쪽을 봤다. 단은 종이 사라진 쪽에서 아직 희미하게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지도에는 온새미 말고도 이름이 지워진 빈칸이 여섯 개 있었다.
라온은 허가서의 일곱 이름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맨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도 지워지지 않았다.
종은 딱 한 번 울렸다. 소리는 가까운 지붕 위를 건너고, 계곡의 흰 벽을 따라 내려갔다. 두 번째 울림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 한 번을 길이라고 부르고 싶어 했지만, 서린은 종추가 다시 흔들리는 것을 막았다. 그 소리는 구조를 알리는 신호였지, 돌아가는 길이 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해나가 먼저 여울을 안고 좁은 계단을 내려왔다. 아이는 울지 않았지만 손가락으로 언니의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모아는 몸을 돌려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방패를 등지게 했다. 어깨가 뻐근해질 때마다 멈춰 섰고, 누군가 대신 들겠다고 나서면 자기 짐에서 물통을 빼 건넸다. 약한 사람을 앞으로 보내는 순서와 무거운 짐을 나누는 순서가 같을 수는 없었다.
라온은 멀리서 답하는 소리를 기다렸다. 아무 응답도 오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종을 울릴 수 있었지만, 이미 지친 사람들에게 다시 계단을 오르내릴 시간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대답이 없다고 사람이 없다는 뜻은 아니야. 그래도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어.”
마지막 주민이 출구를 통과할 때 서린은 계단 아래의 빈자리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고쳐 달라던 쇠핀과 교대 종지기는 오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 나왔지만, 한 번의 구조가 무엇을 끊었는지는 아직 모른 채였다. 종소리는 뒤를 비추지 않았다. 발밑을 확인할 만큼만 길게 남았다.
계곡 아래에 내려온 사람들은 이름을 불러 서로를 확인했다. 누군가는 자기 이름을 들었지만 대답하지 못했고, 누군가는 여울을 알아보지 못했다. 서린은 여울의 손을 잡고 아이가 한 번 대답할 때마다 손가락 하나를 폈다. 손가락은 다섯에서 멈췄지만, 아이는 끝까지 자기 이름을 말했다.
“우리가 모두 나왔는지 확인해야 해.” 라온이 말했다.
성문이 보이지 않으니 명단도 없었다. 만재가 돌가루 묻은 손으로 사람을 세었고, 미선은 먼저 나온 이와 뒤에 나온 이를 따로 기억했다. 해나는 다친 사람 수를 기록했다. 세 기록의 합은 서른두 명이었다.
그 숫자를 확인하고도 누구도 안심하지 못했다. 종소리를 한 번 더 냈다면 더 많은 사람이 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종을 더 울려 그림자를 불렀다면, 지금 탈출한 사람도 위험해졌을 것이다. 서린은 그 선택을 “옳았다”고 정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때 그렇게 결정했고, 살아 나온 수는 서른둘”이라고만 썼다.
서른두 명은 성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처지는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종탑은 안개 속으로 가려졌다. 모아는 걸음을 맞추느라 방패끈을 한 번 더 풀었다.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모두가 자기 발로 도착하는 것이 먼저라는 합의는 말없이 유지됐다.
탈출한 이들은 계곡 바람을 피해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여울이 세 번째로 자기 이름을 말했을 때 서린은 한 번만 대답했다. 두 번 불러야 기억될 거라는 약속이 아직 누구에게나 통하는 규칙은 아니었다. 여울은 자기 목소리로 한 번 더 이름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