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셋째 날 새벽, 라온은 작업장 목패가 물에 떠내려가는 꿈을 꾸고 달려왔다. 실제로 떠내려간 것은 나무패 하나였다. 천막 끝에서 샌 비가 아직 마르지 않은 ‘수’ 자를 번지게 했다. 라온이 소매로 닦으려는 순간 패의 주인이 손을 뻗었다.
“그건 제가 고칠게요. 지금은 항아리 쪽이나 봐 주세요.”
패의 주인은 손가락 끝에 묻은 검은 물감을 치맛자락에 닦았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라온에게 나무패를 어느 높이에 걸면 좋겠느냐고 묻던 사람이었다. 라온은 항아리를 들면서도 몇 번이나 돌아봤다. 글자가 번진 패는 작업장 문 앞에 있었다. 그 문이 한철 뒤에도 남아 있을지 누구도 약속하지 못했기에, 오늘 젖은 한 획이 더 아까웠다.
다래와 석주가 밤새 잘라 낸 홈통 조각을 기울여 물을 바깥 항아리로 보내고 있었다. 서른두 주민은 통로를 비워 자고, 아침에는 저마다 젖은 물건을 옮겼다. 일곱이 오기 전부터였다. 라온은 안도하다가 조금 서운했다. 모아는 그가 물그릇을 들었다 놓는 것을 보고 웃었다.
“둘 중 어느 쪽이야? 기뻐, 서운해?”
“둘 다.”
“그럼 오늘은 네가 구할 게 적어서 다행이네.” 모아는 다친 어깨에 방패를 걸지 않았다. 청환을 먹은 뒤 힘의 방향이 더 또렷해졌어도 붕대 밑의 통증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남은 팔로 항아리 손잡이의 균형만 잡아 주었다. 다래가 물을 버릴 때를 정했고, 모아는 그때 손을 뗐다.
항아리가 무거워지자 어린 여울이 작은 바가지를 들고 나왔다. 라온은 아이를 안쪽으로 돌려보내려다가 발을 멈췄다. 여울은 바닥의 마른 선을 따라 물을 옮기고 있었다. 다래가 아이에게 준 자리였다. “여기는 안 미끄러워요.” 여울이 발끝으로 선을 짚었다. 라온은 아이의 바가지를 빼앗는 대신 마른 선이 끊긴 곳에 천 조각을 깔았다. 여울이 건넌 뒤에야 자기 항아리를 들었다.
처마 바깥에서는 단이 미끄러운 기와에 발을 올렸다가 즉시 내려왔다. 시온이 맞은편에서 접힌 천의 끝을 가리켰다. “위가 두 손 너비 들렸어.” 도윤은 망치를 꺼냈다가 잠든 주민의 항의를 듣고 조용히 쐐기를 손으로 눌렀다. 라온과 석주가 아래에서 끈을 당기자 물줄기는 항아리의 가운데로 들어갔다. 지붕 전체를 고친 건 아니지만, 오늘 만들 패는 마를 수 있었다.
이든은 바닥에 남은 세 닢을 세지 않았다. 대신 젖은 천을 한 번 만졌다. “지금 널판을 사면 이걸 버려야 해요. 비가 멎은 뒤 장인에게 값부터 물어봐요.” 다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인이 올 때까지 물을 받을 순서도 주민들끼리 정해 두었다. 이든은 처음 계산에서 빠뜨린 것이 사람이 밤새 비울 수 있는 횟수였음을 인정했다.
만재는 젖은 판자 하나를 라온에게 건넸다. 어젯밤 주민들이 받침으로 썼다가 물이 빠지자 떼어 둔 것이었다. “이건 버리지 말고 말려 줘. 아직 쓸 수 있어.” 라온은 판자를 들고 가다가 주민들의 수리표를 봤다. 새 지붕, 물받이, 작업대 자리. 빈칸마다 담당 이름이 있었다. 일곱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린이 그를 따라와 표 맨 아래 빈 여백을 가리켰다. “일감을 더 적을 자리는 있어. 네 이름을 지운 건 아니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라온이 말했다. 반은 거짓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이 없으면 누군가 손을 놓을까 걱정했다. 지금은 누군가 손을 놓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서운했다. 서린은 젖은 판자를 뒤집어 그에게 쥐여 주었다. “그럼 네가 지금 할 일은 이걸 햇빛에 놓는 거야.” 라온은 웃으며 판자를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막 떠오른 해는 판자 한쪽만 비추었다. 그는 그늘 쪽을 햇빛으로 돌려 놓았다.
젖은 패의 주인은 퍼진 획 위에 가느다란 선을 새겼다. ‘수’의 마지막 획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여울은 “물도 한 획 썼네요”라고 했고, 주인은 이번 것이 더 좋다고 했다. 라온은 패를 걸어 주겠다는 말을 삼켰다. 주인은 이미 걸 자리를 골랐다.
그때 조합의 심부름꾼이 문을 두드렸다. 북부 수리공에게 축 고정쇠를 가져갈 사람과 약재 수레를 지킬 사람을 찾는다는 전갈이었다. 둘 다 내일 떠나야 한다. 도윤은 ‘쇠마루’라는 지명을 듣자 웃었고, 해나는 ‘산기슭 진료소’를 듣자 바로 약재 이름을 물었다. 라온은 작업장 안을 돌아봤다. 그들이 떠나도 이곳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마음 한쪽이 가벼워진 만큼, 자신들이 밖에서 벌어 올 몫이 생겼다.
심부름꾼은 떠나기 전 작업장의 물받이를 한참 보았다. “길잡이들이 벌써 고쳤네요.” 다래가 젖은 소매를 짜며 대꾸했다. “우리가 먼저 했고, 저 사람들도 거들었어요.” 심부름꾼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라온은 그 말이 더 좋았다. 자신들이 없던 밤의 일을 자기들 공으로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심부름꾼을 따라 나서기 전, 여울의 마른 선이 출입문까지 닿는지만 한 번 더 확인했다.
점심 무렵 다시 빗방울이 떨어졌을 때 주민들은 항아리를 저마다의 자리로 옮겼다. 임시 홈통 끝에서 물이 넘치자 여울이 먼저 라온을 불렀다. 라온은 팔을 뻗었다가 만재가 안쪽에서 준비해 둔 작은 통을 받아 천천히 바꿔 놓았다. 새 지붕은 없었다. 대신 누가 다음 비를 볼지 적힌 수리표가 있었다. 그는 그 표를 믿고 저녁 조합으로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