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 벽의 점검표에는 세 칸이 있었다. 수경이 맨 위에 오늘 날짜를 쓰고 하린에게 펜을 건넸다.
“세 대 다 검사하고 나면 헬리안은 네가 대회 끝날 때까지 쓸 수 있어. 계약은 2주로 끊을 거고.”
“세 번째도 오늘 끝내면요?”
“끝나면. 확인도 안 하고 완료 표시부터 하는 건 안 돼.”
하린은 펜 뚜껑을 닫았다. 어제 첫 경기를 치르고 나서 카르덴의 주행 기록을 여러 번 보았다. B까지 가는 선은 매번 같았고, 멈출 수 있었던 작은 공간도 매번 같은 자리에 있었다. 경기를 되돌려 보며 자기 엄지에 브레이크를 걸 수는 없었다. 대신 오늘은 점검할 기계가 셋 있었다.
첫 번째 시연기는 발바닥 고무가 오른쪽으로 밀려 있었다. 어제 남의 기체에서 본 것과 같은 문제였다. 하린은 낡은 패드를 떼고 새것을 붙였다. 두 발에 하중을 걸고 제자리걸음을 시켜 보니 좌우 흔들림이 허용선 안에 들어왔다.
두 번째 시연기는 팔의 잠금쇠가 끝까지 닫히지 않았다. 연결부 안쪽에 잘린 포장 끈 한 가닥이 끼어 있었다. 하린은 끈을 빼고 같은 팔을 다시 끼웠다. 팔을 두 번 당겨 보고, 손을 뻗었다 접는 동작을 세 번 시켰다.
점검표의 1번과 2번에만 완료 표시가 생겼다.
하린은 펜끝을 세 번째 칸 위에서 멈췄다. 완료 표시 두 개가 나란히 있으니 마지막 칸도 금방 채워질 것처럼 보였다. 수경은 그 모습을 보고 시험 기록지를 한 장 더 꺼내 왔다.
“장비를 빌리는 조건을 너무 까다롭게 만든 것 같아?”
“아뇨. 제 것이면 더 꼼꼼히 봤을 거예요.”
수경이 잠깐 웃었다. “내 것이니까 덜 봐도 된다고는 안 했어.”
하린은 세 번째 시연기의 발과 배터리 연결부를 다시 살폈다. 충전 상태가 시험 조건에 못 미치는 것은 고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상태에서 몇 걸음 움직여 보고 합격이라고 쓸 수는 없었다. 자기가 빌릴 헬리안만 생각하다가 이 기계가 다음 어린 참가자에게도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려 했다. 그녀는 미완료 칸을 비워 두었다.
3번 기체는 충전 거치대에 있었다. 배터리 표시가 절반을 조금 넘었다. 하린은 외관과 연결부를 확인하고 시험 항목을 펼쳤다. 마지막 줄에는 일정한 하중을 건 상태로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 적혀 있었다. 지금 배터리로 짧게 움직여 보는 것은 가능했지만, 정해진 부하 시험을 끝내기에는 부족했다.
“충전 끝나면 다시 올게요.” 하린이 말했다.
수경은 표의 3번 칸을 가리켰다. 하린은 거기에 충전 중 / 부하 시험 미완료라고 적었다. 날짜도 오늘 것으로 남겼다. 세 칸 중 둘만 완료였다.
“계약서는 내일 검사 끝난 뒤에 쓰자.” 수경이 말했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빌리고 싶은 마음과 검사가 끝난 기계는 별개였다.
공방 뒤쪽에서는 다미가 테르가드를 저벽 옆에 세우고 같은 정지선을 반복해서 밟고 있었다. 하린은 옆 경기대의 빈 자리를 빌려 카르덴을 꺼냈다. A에서 B로 향하던 어제의 경로를 그대로 따라가다가, 경계가 가까워지기 전에 스틱에서 손을 뗐다. 카르덴이 멈추자 앞발과 선 사이에 손가락 둘 정도의 폭이 남았다.
“이번엔 여기서 멈췄네.” 다미가 말했다.
“응. 표식까지는 못 갔어.”
“그다음에 가면 되지.”
하린은 돌아설 자리를 본 다음 짧게 다시 움직였다. B를 밟는 데 어제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안전 면에는 발이 닿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도 그랬다. 다미는 자기 기체로 자기 선을 다시 밟았다. 두 사람의 연습은 서로의 일을 대신해 주는 시간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점검표에는 어제 날짜가 적힌 두 완료 칸과 3번의 미완료 메모가 그대로 있었다. 수경은 새로운 날짜가 적힌 시험 기록지를 옆에 놓았다. 3번 시연기는 충전을 마치고 거치대 밖에 서 있었다.
전날 비가 온 뒤라 공방 바닥에 옅은 습기가 남아 있었다. 하린은 두 점검표를 나란히 펼쳤다. 첫 장에는 어제의 날짜와 완료 두 개, 미완료 하나. 둘째 장에는 오늘의 날짜와 비어 있는 부하 시험 항목뿐이었다. 한 장에 이틀을 우겨 넣어 끝난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으려는 수경의 방식이었다. 하린은 첫 장을 덮지 않고 옆에 놓은 채 세 번째 기체를 켰다.
다미가 자기 기체 케이스를 들고 들어오다 그 종이를 봤다. “아직 세 번째야?”
“어제는 충전만. 오늘은 부하 시험.”
“헬리안 기다리고 있겠네.”
“그보다 이걸 기다렸어.” 하린은 시험 항목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다미는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뒤 자기 정지 연습을 시작했다. 둘의 발소리가 다른 박자로 공방에 퍼졌다.
하린은 배터리 잔량을 확인했다. 기체의 두 다리에 정해진 하중을 걸고 걷기·멈추기·방향 전환을 순서대로 시켰다. 마지막 동작 뒤에도 과열 경고가 없었다. 수경이 시험 시간을 확인하고 서명했다. 하린은 3번 부하 시험 완료를 새 날짜 아래에 적었다.
“이제 세 대 끝났어.” 수경이 말했다.
그제야 대여 계약서가 나왔다. 공방 소유, 하린 사용. 시작은 오늘, 반환은 본선이 끝난 뒤 며칠 여유를 둔 열나흘째. 경기 전 검사에서 하린의 두 번째 완성기로 등록할 수 있다는 항목도 있었다. 하린은 사용 중 고장이 나면 먼저 신고한다는 줄을 읽고 이름을 썼다.
수경이 다른 케이스를 열었다. 안쪽에 누운 기체는 카르덴보다 다리가 길고, 가슴에는 선명한 노란 면이 있었다. 백팩은 두 개의 짧은 동력 하우징으로 몸에 붙어 있었다. 헬리안이었다.
“낮은 벽 하나는 넘을 수 있어.” 수경이 말했다. “그다음까지 자동으로 해 주는 건 아니고.”
“알아요.”
하린은 헬리안을 경기대에 세웠다. 같은 조종기를 써도 첫 걸음의 느낌이 달랐다. 발을 떼기 전에 몸이 조금 더 낮아졌고, 발목이 짧게 튀어 올랐다. 시험 삼아 낮은 벽을 넘겼다. 착지는 멀지 않았다. 충분해 보였다.
“한 판 할래?”
오시온이 반대쪽에 자기 기체 오르덱스를 놓았다. 회청색 몸통의 허리가 얇게 드러나 있었다. 시온은 벽 사이의 좁은 길을 한 번 바라보고 기체를 출발점으로 옮겼다. 하린이 예전에 조종법을 배울 때도 그는 대답보다 질문이 빨랐다. 오늘은 먼저 묻지 않았다.
단판 연습이 시작됐다. 하린은 헬리안을 낮은 벽 앞으로 보냈다. 다리를 굽혔다 펴자 기체가 벽 너머로 넘어가 B에 착지했다. 불이 켜지고 하린에게 첫 점수가 들어왔다. 착지까지는 계획대로였다.
그 사이 오르덱스는 반대쪽 C로 들어갔다. 시온이 허리를 틀어 좁은 틈에 몸을 맞춘 뒤 표식을 밟았다. 점수는 같아졌다.
하린은 중앙 A로 향했다. 헬리안의 도약을 한 번 더 쓰면 길이 짧아졌다. 엄지가 트리거 위에 올라갔다가 멈췄다. 잔량 표시가 생각보다 빠르게 줄어 있었다. 처음 벽을 넘고 착지하면서 쓴 전력에, B에서 돌아 나오는 걸음까지 더해진 탓이었다.
그녀는 트리거 대신 평지 경로를 택했다. 하지만 착지 직후 돌아설 자리까지 미리 잡지 못한 기체는 벽을 따라 크게 우회해야 했다. 오르덱스는 회전 허리로 더 짧은 각도를 만들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때 시온의 기체가 A를 먼저 밟았다.
연습 종료. 하린 1, 시온 2.
하린은 경기가 멈춘 뒤에도 헬리안을 곧바로 회수하지 않았다. 착지했던 B 뒤의 빈 바닥을 눈으로 재 봤다. 처음에는 넓어 보였는데, 실제로는 헬리안의 긴 다리가 다음 걸음을 내딛을 만큼만 남아 있었다. 발을 놓는 데 그 자리를 다 써 버리면 몸을 돌릴 폭이 없었다. 시온의 오르덱스가 특별히 더 세서 진 경기가 아니었다. 하린은 B를 얻은 순간 이미 다음 움직임을 좁혀 놓았다.
“점프는 보기 좋았어.” 다미가 뒤에서 말했다. 조금 전부터 경기장에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점프 뒤엔 안 봤구나.”
“응. 네 눈이 A에 가 있었어.”
하린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기억났다. 착지하는 기체보다 다음 표식을 먼저 보았다. 기계가 어디에 섰는지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다음 명령을 생각했다. 다미는 하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헬리안의 케이스를 받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기체를 넣는 건 하린이 직접 하게 두었다.
시온은 오르덱스를 안전 대기 위치로 옮기고 조종기를 내려놓았다.
“첫 착지는 좋았어.”
하린이 헬리안의 배터리 기록을 열었다. “그 뒤에 나갈 한 걸음을 안 봤어요.”
“다시 뛸 수는 있었는데?”
“그럼 돌아올 전력이 없었겠죠.”
시온이 화면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기 경기 기록을 저장하러 옆 작업대로 갔다. 하린은 헬리안의 발을 확인한 뒤 대여 케이스에 눕혔다. 카르덴 케이스와 나란히 놓으니 두 대가 분명히 다른 기계였다. 그렇다고 경기에서 해야 할 선택이 두 배로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노트의 한 줄에는 어제 적은 글씨가 있었다. 카르덴: 돌아설 공간. 하린은 그 아래에 새 줄을 만들었다.
헬리안: 착지 뒤 한 걸음.
내일은 두 대를 들고 등록하러 가야 했다. 하린은 대여 계약서와 두 케이스의 실물 번호를 확인하고 노트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