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카리온

링워크 · 소설

《링워크》 9화 · 각자의 작업대

노을은 관람석에서도 펜을 들고 있었다. 다른 선수의 경기가 끝나면 점수판보다 마지막 발의 위치를 먼저 그렸다. 다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16강에서 자신의 그라벤이 수리 뒤 B로 들어가던 길, 8강에서 태록의 정지를 기다리던 길이 이미 공개 기록에 남아 있었다. 노을은 그것을 다시 그렸을 것이다.

“기록 보는 거 싫어요?” 노을이 검사대에서 물었다.

“아니요. 저도 보니까요.”

“그럼 오늘은 서로 많이 알겠네요.”

노을은 직선형 베르칸을 꺼냈다. 가는 다리와 앞으로 쏠린 자세가 처음부터 출발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미는 그라벤의 오른발 연결부를 확인하고 기체를 세웠다. 옆 검사표에는 며칠 전 수리 승인 번호가 남아 있었다. 오늘 검사 역시 통과했다. 다미는 더는 그 칸을 손가락으로 쓸지 않았다.

첫 라운드가 시작되자 노을은 베르칸을 곧장 A로 보냈다. 다미는 그의 직선이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미리 오른쪽으로 발을 뺐다. 그래도 순간 눈이 A를 따라갔다. 15초에 노을이 중앙을 선점했다. 다미는 방향을 바꾸지 않고 B로 갔다. 저벽 앞에서 몸을 낮게 돌려 44초에 표식 위에 섰다. 점수는 같았다.

노을의 베르칸은 예상보다 멀리 우회했다. 다미가 C로 가는 자기 평소 경로를 택하면 마주치지 않는 길이었다. ‘내 기록을 보고 있다면 이 길을 막겠지’라고 생각한 게 오히려 다미를 멈추게 했다. 그녀는 베르칸의 직선을 다시 보려고 한 번 멈췄다. 노을은 그 사이 C 쪽 저벽 끝을 지나갔다.

“지금도 보고 있어?” 다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노을에게가 아니라 자기에게였다.

82초, C가 노을의 색으로 바뀌었다. 첫 라운드 1 대 2. 다미는 손을 떼고 그라벤의 발을 확인했다. 늦어진 이유는 발목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경로를 피하려다 그 경로 밖에서 서 버린 자기 결정이었다.

노을이 재생 화면을 닫지 않고 기다렸다. “B로 간 건 예상했어요.”

“그다음은요?”

“당신이 멈출 건 예상 못 했어요.”

다미는 웃음이 나왔다. 기록으로 모든 동작을 알 수 있다면 경기를 할 이유도 없었다. 어제의 자신이 오늘을 대신 조종하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자신이었다.

두 번째 라운드, 다미는 테르가드를 세웠다. 노을의 두 번째 기체는 오르덱스였다. 직선형에서 전환형으로 바뀌자 표식까지의 선이 달라졌다. 다미는 출발 전에 C로 가는 길을 길게 바라보았다. 첫 라운드에서 노을이 가져간 표식이라서가 아니었다. 테르가드의 넓은 발을 가장 온전히 둘 수 있는 바닥이 그쪽에 있었다.

시작 신호 뒤 다미는 망설이지 않고 C를 밟았다. 20초. 노을의 오르덱스는 허리를 틀어 중앙 A로 들어갔고, 43초에 1 대 1을 만들었다. 노을은 곧 B 쪽으로 갈 길을 잡았다. 다미의 공개 기록에는 C에서 곧장 B 안쪽으로 향하다 코너 앞에서 멈추는 선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선은 지금도 갈 수 있었다.

다미는 테르가드를 반대쪽으로 두 걸음 옮겼다. 표식에서 멀어지는 모양이었다. 노을이 오르덱스의 허리를 돌려 그녀를 확인했다. 다미는 이미 넓은 바닥에서 방향을 바꿨다. 저벽 바깥 끝을 돌아 B로 접근하는 동안 테르가드의 뒤쪽 발은 계속 안쪽에 있었다. 노을의 오르덱스는 안쪽 지름길을 택했지만 마지막에 발을 다시 맞춰야 했다. 79초, 다미가 B를 먼저 밟았다.

라운드 2 대 1. 노을은 화면에서 다미의 새 선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었다. “내가 그려 둔 길이 아니었네요.”

“저도 오늘 처음 쓴 길이에요.”

“다음엔 그릴 수 있겠죠.”

“그럼 다음엔 또 다른 길을 봐야죠.”

두 사람 다 우쭐해하지 않았다. 노을이 틀린 것도, 다미가 기록을 무시한 것도 아니었다. 기록은 상대를 이해할 재료였고, 오늘 움직일 발은 여전히 살아 있는 선택이었다.

세 번째 라운드에는 다시 그라벤과 베르칸이 섰다. 첫 라운드의 조합이었다. 관객석에서는 같은 경기가 반복될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다미는 기체 발을 놓는 위치를 몇 센티미터 바꿨다. 같은 기체로 다른 출발 각도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연습 때 알았다. 등록된 부품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출발. 다미는 왼쪽 C로 갔다. 노을의 베르칸은 중앙으로 향하는 척하다 B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미는 그 움직임을 따라가지 않았다. 24초에 C가 다미의 색이 됐다. 노을은 43초에 B를 선점했다. 1 대 1. 중앙 A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노을이 A로 들어가는 직선에 베르칸을 맞췄다. 다미의 그라벤은 그보다 느렸다. 직선만 재면 먼저 닿을 수 없었다. 다미는 A를 향해 가장 짧게 가려던 손을 멈췄다. 베르칸이 출발하기 좋은 길 앞에서 서 있는 동안, 그녀는 저벽 끝의 넓은 평지를 따라 몸을 돌렸다. 속도를 올리기 전에 서는 방향을 맞춘 것이다.

노을은 한 번 출발했다가 그라벤의 진로를 보고 미세하게 꺾었다. 그 작은 각도 수정에 베르칸의 발이 두 번 더 바닥을 찾았다. 다미는 넓은 발을 한 번 고쳐 딛고 멈춤 없이 중앙으로 들어왔다. 80초. 그라벤이 A를 먼저 밟았다. 남은 몇 초 동안 노을은 이미 점유된 표식을 향해 더 달리지 않았다. 종료. 다미 2 대 노을 1, 경기 전적 2 대 1. 다미가 결승에 올랐다.

노을은 악수 뒤 노트를 폈다. “마지막엔 A를 곧장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맞았네요.”

“그런데 어느 쪽으로 돌지 몰랐어요.”

다미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출발 전까지 완전히 알지 못했다. 기체가 서는 위치를 보고 고른 길이었다. 오늘의 선택을 어제 노트에 적어 둘 수는 없었다.

검사대에서 다미는 그라벤 발목의 나사를 다시 확인했다. 부품 번호를 쓰고, 방향 전환 뒤 하중 시험도 통과했다고 기록했다. 16강 때와 달리 이번에는 수리 내역이 새로 생기지 않았다. 정상 상태를 유지한 근거도 기록의 일부였다. 노을의 관전 노트처럼, 이 문서는 다음 번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공방에 돌아오자 하린이 먼저 와 있었다. 두 사람의 케이스가 작업대 양끝에 놓였다. 수경은 가까운 곳에 평소와 같은 조명을 켜 두고 뒤쪽 의뢰대를 정리했다. 하린이 카르덴의 팔을 확인하는 동안 다미는 테르가드 발의 패드를 눌렀다. 누가 누구의 기체를 봐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시온전 봤어.” 다미가 말했다. “마지막에 A가 비었더라.”

“응. 못 간 건 아니야. 다른 점수를 봤어.”

“내 세 번째도 C 먼저 갔어.”

“봤어. 노을이 네 옛 경로를 기다리는 것 같았어.”

다미는 작업등 너머 하린을 봤다. “내일 네 길을 보면, 나는 어디서 멈춰야 할까?”

하린은 조종기를 잠깐 내려놓았다. 둘이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내일의 경기를 미리 축소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에게 답을 정해 주는 순간, 자기에게도 같은 대답을 하게 될 것 같았다.

“나도 네 정지를 보고 어디로 갈지 골라야지.”

다미가 짧게 웃었다. “그래. 서로 직접 보자.”

수경이 두 사람에게 케이스 잠금 확인표를 건넸다. 하린은 헬리안의 대여 종료일을 한 번 더 봤다. 결승은 아직 사용 기간 안이었다. 다미는 수리 장학 신청서를 케이스 속에 넣었다. 우승해야만 낼 수 있는 서류는 아니었다. 그래도 경기를 끝까지 자기 이름으로 치른 뒤 내고 싶었다.

공방 문을 닫을 때 두 사람은 작업대 양쪽을 다시 정리했다. 점검표와 기체 케이스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겼다. 내일 어느 쪽 이름이 전광판 위에 놓이든, 경기 뒤에는 두 케이스를 다시 이 자리로 가져올 것이다. 다미는 그 생각을 하며 손잡이를 쥐었다. 긴장을 덜어 주지는 않았지만, 돌아와야 할 장소를 분명히 해 주었다.

《링워크》 9화 · 각자의 작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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