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카리온

링워크 · 소설

《링워크》 4화 · 모서리에서

경기대 바깥에는 사람보다 케이스가 먼저 모였다. 공방에서 볼 때는 넓어 보이던 테이블이 관중 사이에 놓이자 갑자기 작아졌다. 하린은 남쪽 조종대 뒤에 카르덴과 헬리안의 케이스를 나란히 세웠다. 건너편에서는 루안이 베르칸의 다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어젯밤 둘은 같은 공방 작업대에서 등록 카드를 접었다. 루안은 하린의 헬리안 대여 계약이 구겨지지 않게 케이스 아래에서 빼 주었고, 하린은 베르칸 다리의 작은 흠집이 표면 도장뿐이라는 걸 확인해 주었다. 지금은 서로의 기체를 만질 수 없었다. 나후가 바닥에 붙인 선수 대기선이 평소보다 멀어 보였다.

“오늘은 안 봐준다.” 루안이 말했다.

“네가 어제부터 그 얘기 세 번째야.”

루안이 웃었다. 그러나 베르칸의 무릎을 잡은 손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같은 공방에서 놀 때는 누가 이기든 점수를 다시 지우고 한 판 더 하면 됐다. 오늘은 경기표의 다음 칸에 한 사람 이름만 올라간다.

심판 나후가 등록 카드와 실물을 차례로 대조했다. 하린의 첫 기체는 카르덴, 루안의 첫 기체는 베르칸. 둘 다 어제 검사받은 조합 그대로였다. 하린은 카르덴의 팔을 한 번 당겨 보고 자기 자리로 물러섰다. 길어진 시험용 팔은 쓰지 않았다.

첫 라운드가 시작됐다. 베르칸은 첫 두 걸음부터 달랐다. 길고 곧은 다리가 중앙 A를 향해 뻗었고, 하린이 카르덴을 돌렸을 때는 이미 루안의 발이 표식을 밟고 있었다. 루안 1, 하린 0.

하린은 베르칸을 따라 중앙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쪽 B로 향해 저벽 끝을 돌았다. 카르덴의 발이 B를 먼저 밟았다. 1 대 1. 하린은 스틱을 놓지 않은 채 왼쪽 C까지 이어질 길을 찾았다.

베르칸은 이미 그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급히 방향을 바꿔야 하는 길이 아니었다. 길게 뻗은 다리의 장점이 그대로 살아났다. 루안이 C를 먼저 차지했고, 남은 시간 동안 카르덴이 닿을 수 있는 새 표식은 없었다. 첫 라운드 1 대 2, 루안 승.

하린은 베르칸이 C를 밟은 뒤에도 자기가 방금 고른 B를 보았다. 첫 점수를 놓친 것을 만회하겠다고 가장 가까운 표식으로 간 선택이었다. B에서 멈춘 카르덴의 발은 온전히 선 안에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C로 향할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낙오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다음 방향이었다.

관객석 뒤에서 공방 어린 참가자들이 작은 기체를 손에 들고 일어섰다. 누군가 “하린 누나 B 멋있었어”라고 말했지만, 하린은 자기 조종기 화면에 비친 얼굴을 봤다. 멋있어 보이는 한 걸음은 다음 걸음이 없으면 금방 끝났다. 그녀는 화면에 C 쪽 방향 화살표를 다시 그었다. 베르칸을 따라잡는 선이 아니라, 베르칸이 먼저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출발 위치를 찾았다.

하린은 점수 화면보다 루안의 두 번째 직선 경로를 오래 봤다. 첫 A를 뺏긴 뒤 자신이 B로 움직일 거라는 걸 루안은 알았다. 베르칸을 급히 돌릴 필요가 없는 C 쪽에 미리 세운 것이다. 하린이 빨라지기만 했다면 다음 표식도 같은 방식으로 내줬을 것이다.

하린이 카르덴을 회수하자 루안이 맞은편에서 엄지를 들어 보였다. 하린도 손을 들었다. 장난처럼 보이지 않게 웃기는 어려웠다.

두 번째 라운드에는 서로 다른 기체를 내야 했다. 하린은 헬리안을, 루안은 카이런을 세웠다. 카이런의 붉은 몸통은 베르칸보다 짧게 선회할 수 있었다. 루안은 시작하자마자 그 장점을 써서 중앙 A를 가져갔다.

하린은 낮은 벽 앞에서 헬리안을 멈췄다. 대여 첫날의 실패가 떠올랐다. 넘어가는 것보다 착지 뒤 한 걸음이 더 문제였다. 그녀는 벽 너머 B와 그다음에 빠져나올 바닥을 먼저 봤다. 헬리안이 짧게 뛰어 B에 내려앉았다. 발을 고쳐 딛고 나서야 다음 입력을 넣었다. 점수는 같아졌다.

카이런은 중앙에서 방향을 바꿔 C로 향했다. 직선으로 달리면 루안이 빨랐다. 하린은 헬리안을 저벽 바깥으로 보내 한 번 돌아 나왔다. 멀어 보였지만 되돌아오느라 허비하는 걸음이 없었다. 헬리안이 C를 먼저 밟았다. 2 대 1. 마지막까지 그 점수가 유지됐다.

루안이 카이런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걸로 그렇게 안 뛰면 손해 아닌가?”

“뛸 만큼은 뛰었어.”

두 사람의 라운드 전적은 1 대 1이었다. 마지막에는 등록한 두 기체 중 하나를 다시 고를 수 있었다. 하린은 헬리안의 케이스를 바라보다 카르덴을 꺼냈다. 긴 다리가 아닌 자기 손에 익은 첫 걸음을 쓰고 싶었다. 루안은 다시 베르칸을 골랐다.

하린은 두 케이스를 나란히 연 채 잠깐 망설였다. 헬리안은 낮은 벽을 넘을 수 있었다. 방금 라운드를 이긴 것도 헬리안이었다. 카르덴은 첫 라운드에서 졌고, 공방에서 처음 연습할 때도 장외로 졌다. 그렇지만 이번 경기면의 마지막 A까지 가는 경로에는 벽을 넘는 것보다 몸을 돌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 카르덴의 첫 걸음이 손에 익어서만이 아니었다. 하린은 지금 자기 판단으로 그 기체를 고르고 있었다.

루안이 베르칸을 세우다가 그녀를 봤다. “다시 처음 조합이네.”

“같은 점수는 안 낼 거야.”

“그건 나도.”

둘은 웃었다. 결승처럼 거창한 약속을 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충분히 어려운 경기가 될 수 있었다. 나후가 두 사람을 각자 조종대 뒤로 물렸다.

나후가 A, B, C 표식을 초기화했다. 첫 라운드의 색은 남지 않았다.

하린은 시작과 함께 중앙으로 뛰지 않았다. 카르덴을 오른쪽 B로 보냈다. 루안도 예상한 듯 베르칸을 그쪽으로 움직였지만, 중앙에서 속도를 내느라 몸을 돌리는 데 한 걸음이 더 걸렸다. 카르덴이 B를 먼저 밟았다.

루안은 왼쪽 C로 돌아 베르칸의 직선 가속을 살렸다. C에는 루안의 색이 들어왔다. 1 대 1. 남은 것은 중앙 A 하나였다.

하린이 경기대 전체를 보았다. A로 향하는 짧은 안쪽 길은 저벽과 베르칸 사이로 열려 있었다. 들어가기는 쉬웠다. 빠져나올 때 카르덴의 어깨를 돌릴 폭이 없었다. 루안이 그 길을 비워 둔 이유를 하린은 알아차렸다.

그녀는 스틱을 조금 뒤로 당겼다. 카르덴이 한 발 물러났다. 루안의 베르칸이 안쪽 입구를 좁히며 따라왔다. 하린은 경계에서 먼 바깥길로 카르덴을 돌렸다. 한 번에 중앙으로 들어가는 길보다 길었다. 대신 마지막 회전을 한 번만 하면 됐다.

루안이 베르칸의 방향을 바꿨다. 긴 다리가 직선으로 뻗기 시작했다. 하린은 카르덴을 더 빨리 밀지 않았다. 돌아설 자리를 남긴 채 A 옆으로 들어갔다. 종료음이 나기 직전, 카르덴의 발이 중앙 표식을 먼저 밟았다.

하린 2, 루안 1. 세 번째 라운드 하린 승. 경기 전적 2 대 1로 하린이 8강에 올랐다.

조종대에서 물러난 하린의 손이 조금 떨렸다. 루안은 자기 기록 화면을 먼저 열었다. 두 기체의 마지막 경로가 겹쳐 보였다.

“이번엔 안 들어오더라.” 루안이 안쪽 짧은 길을 가리켰다.

“나올 데가 없었어.”

“알면서도 유혹적이잖아.”

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안은 자기 경로를 저장한 뒤 하린에게 화면을 돌렸다. 따라갈 수 없었던 지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고른 지점에 두 사람의 손가락이 나란히 놓였다.

“여기서는 네가 나 따라올 줄 알았어.” 루안이 안쪽 길을 확대했다.

“첫 연습 때 거기 비슷한 데서 졌어.”

“네가 진 걸 알아서 내가 기다렸는데.”

하린은 루안의 손가락이 멈춘 자리를 봤다. 서로가 서로의 기록을 알고 있어도 마지막 조종은 바뀔 수 있었다. 루안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마지막 직선의 베르칸은 분명 빨랐다. 하린이 A를 밟은 건 루안이 실수해서가 아니었다. 바깥길을 먼저 선택해 몸을 틀 기회를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더 좁게 막겠지.” 하린이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두 사람은 경기표를 봤다. 오늘은 다음이 없었다. 루안이 먼저 화면을 닫고 하린의 케이스 손잡이 앞에서 손을 거뒀다. 어제라면 들어 줬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서로 한 판을 끝낸 선수였다. 하린이 직접 손잡이를 잡았다.

다미가 옆 통로에서 두 케이스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는 그녀가 경기대 반대편에 선다. 하린은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다미가 먼저 물었다.

“카르덴 발은 괜찮아?”

“응. 이번엔 선 안에 있었어.”

다미는 웃고 자기 차례가 적힌 안내판을 보러 갔다. 하린도 케이스를 닫아 자리를 비웠다. 경기대 중앙의 불은 꺼지고, 다음 두 선수를 위해 표식이 다시 비워졌다.

《링워크》 4화 · 모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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