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은 카르덴을 경기대 가장자리에서 세 걸음 물렸다. 첫 번째 걸음은 빨랐다. 두 번째 걸음에서는 오른발이 선 가까이 왔다. 세 번째에야 몸을 돌릴 폭이 생겼다. 주행선을 저장하자 앞서 그은 주황색 선 두 개가 새 선 밑으로 비쳤다. 모두 같은 자리에서 급히 꺾였다.
“오른쪽 발 패드는 정상.” 수경이 말했다.
“알아요. 제가 자꾸 거기서 손을 늦게 놔요.”
수경은 패드를 하린 쪽으로 돌려 놓았다. 고쳐야 할 부품이 없으면 공방에서 하던 일은 금방 끝났다. 하린이 싫어하는 쪽은 그다음이었다. 몸에 익은 길을 고쳐야 했다.
본선 첫날 뒤의 휴식일이었다. 루안과 16강을 치른 카르덴은 팔 잠금쇠까지 정상이었고, 대여한 헬리안의 착지 발목도 허용 범위 안이었다. 하린은 둘 다 점검표에 써 놓고도 작업대에서 떠나지 않았다. 상대인 차예솔의 공개 경기 기록을 켜 놓았기 때문이다. 예솔은 처음 표식을 양보한 라운드에서도 끝나기 직전에 두 표식을 가져갔다. 재생 막대를 옮길 때마다 그가 비운 길이 먼저 보였다.
다미가 저녁 의뢰품을 선반에 올리며 물었다. “몇 번째 돌려 보는 거야?”
“다섯 번째.”
“세 번째부터는 뭐가 달랐어?”
하린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화면에서 예솔의 오르덱스가 중앙을 바라봤다가 오른쪽으로 돌아 나갔다. 중앙 A는 비어 있었다. 상대가 거기로 달려가는 동안 예솔은 좁은 길을 지나 B 앞에서 오래 멈췄다. 그 정지가 망설임인지 계산인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A를 놓친 줄 알았어.” 하린이 말했다. “지금은 놓아둔 것 같아.”
“그러면 네가 A를 안 밟을 거야?”
“밟아야지. 다만 다음 점수가 공짜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어.”
다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테르가드의 넓은 발을 한 번 닦고는 반대편 경기대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하린에게 다음 동작을 가르치지 않았다. 다미에게도 이틀 뒤 8강이 있었다.
하린은 카르덴의 경로 위에 두 개의 작은 표시를 더했다. 돌아설 자리. 남겨 둘 걸음. 첫 선을 기록할 때는 패배 뒤에야 보였던 것들이었다. 이번에는 시작 전에 적었다. 헬리안 기록에는 별도의 표시를 달았다. 카르덴보다 긴 착지 거리와, 점프 한 번 뒤에 평지로 되돌아올 전력. 두 기체에 같은 숫자를 적을 수 없었다.
다음 날 현포 대회장은 공방보다 넓었지만 경기면 자체는 같았다. 관람석에서 보면 낮은 벽들이 장난감처럼 보였다. 조종대 앞에서는 그 벽 하나가 발을 놓을 자리보다 컸다. 하린은 등록된 카르덴과 헬리안의 실물 번호가 검사표와 맞는지 확인했다. 예솔은 회청색 오르덱스를 세웠다. 시온의 것과 같은 계열이어도 별도 기체였다. 등 뒤에 작은 색 표시가 달려 있었다.
“첫 점수는 가져가도 돼.” 예솔이 인사 뒤에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더 가져가고 싶어지는데요.”
예솔이 웃었다. “그럼 보고 있어야지.”
시작 신호가 울렸다. 카르덴은 중앙 A로 향했다. 예솔의 오르덱스는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오른쪽 벽에 가까운 길을 고른 뒤 정지했다. 하린은 카르덴의 발을 A 위에 얹었다. 불이 켜졌다. 14초, 하린 1점. 관객이 짧게 박수를 쳤다.
오르덱스는 하린이 A에서 나오는 각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린은 왼쪽 C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B가 더 가까웠다. 예솔이 B 쪽에 이미 몸을 틀고 있었는데도 하린은 벽 사이를 통과하면 먼저 닿을 수 있다고 계산했다. 첫 선을 넘었던 코너와는 모양이 달랐다. 그래서 같은 실수를 다시 하는 줄 모른 채 속도를 올렸다.
예솔이 B를 밟았다. 39초. 점수는 같아졌다. 하린은 카르덴을 돌렸다.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러나 B로 들어갈 때 쓴 걸음만큼 밖으로 빼야 했고, 저벽을 돌아 C에 접근하려면 다시 가속해야 했다. 예솔의 기체는 B에서 짧게 멈춘 다음 이미 다른 통로로 나가고 있었다.
하린은 마지막 직선에서 스틱을 끝까지 밀지 않았다. 그렇게 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발의 위치로 알았다. 84초에 예솔이 C를 선점했다. 종료 신호가 울릴 때 카르덴은 C 한 걸음 앞에 있었다. 점수는 하린 1, 예솔 2. 첫 라운드를 내줬다.
하린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선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잘 달렸다는 뜻은 아니었다. 시작 전에 적은 두 단어 중 뒤쪽을 잊었다. B까지 갈 걸음은 셌으면서 B에서 돌아올 걸음은 세지 않았다.
“A를 일부러 줬어요?” 예솔이 물을 만큼 가까이 왔다.
“일부러 받았죠. 그다음이 문제였어요.”
예솔은 대답하지 않고 자기 오르덱스를 케이스에 넣었다. 라운드 사이에는 서로의 기체를 손댈 수 없었다. 하린은 헬리안을 꺼냈다. 두 번째 라운드는 다른 등록 기체를 써야 한다. 예솔은 정지형 그라벤을 세웠다. 같은 계열의 기체를 다미도 썼지만, 이 녀석의 발에는 예솔 실물 번호가 붙어 있었다.
헬리안은 낮은 벽 앞에서 몸을 낮췄다. 하린은 첫 점프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예솔이 중앙 A로 가는 걸 보면서도 기다렸다. 그라벤이 A를 선점한 것은 20초였다. 하린의 화면에는 예솔 1이 떴다. 관객석 한쪽에서 아쉬운 탄성이 흘렀다.
“안 뛰네.” 시온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하린은 조종대 밖을 보지 않았다. B 쪽으로 열린 길을 확인했다. 벽 하나를 넘으면 빨랐지만, 헬리안이 착지한 뒤 다시 안쪽으로 돌 수 있는 평평한 구간은 짧았다. 그녀는 점프 대신 두 걸음 더 걸어 벽 끝을 돌아갔다. 37초에 B가 켜졌다. 1 대 1.
예솔이 그라벤을 느리게 움직였다. 벽 반대쪽에서 기다리다가 C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몸이 차지하는 폭 때문에 하린에게는 더 멀리 돌아가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하린은 헬리안의 발을 저벽 앞에 세우고서야 도약 버튼을 눌렀다. 목적은 C로 날아가 곧바로 착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벽을 넘어도 기체가 멈출 수 있는 넓은 바닥이 그 뒤에 있었다.
한 번 뛰고, 착지하고, 남겨 둔 평지 걸음으로 C를 밟았다. 75초. 하린 2, 예솔 1. 헬리안의 잔량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예솔은 이미 빼앗긴 표식을 재차 밟지 않고 빈 길을 찾았지만, 셋 중 미점유 표식은 없었다. 종료. 경기 전적이 1 대 1로 바뀌었다.
라운드 사이 하린은 대여 케이스의 손잡이를 오래 쥐고 있었다. 어제까지 헬리안을 가지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방금 얻은 점수는 기체가 혼자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뛰지 않은 첫 20초와 뛴 뒤 남긴 걸음이 같은 점수 안에 있었다.
세 번째 라운드는 카르덴과 오르덱스였다. 표식 세 개가 다시 꺼졌다. 앞선 두 라운드의 점수가 따라오지 않았다. 하린은 예솔을 보지 않고 경기대 바깥 안전 면을 먼저 살폈다. 첫 연습에서 카르덴을 세웠던 자리와 비슷한 주황색 폭이 있었다. 그때 하린에게 없었던 것은 용기가 아니라 멈출 시점이었다.
시작. 하린은 카르덴을 중앙 A로 보내 20초에 선점했다. 이번에도 예솔은 중앙을 막지 않았다. 그는 오른쪽 B를 37초에 가져갔다. 점수는 다시 같아졌다. 하린의 손이 B 쪽으로 가려다 멈췄다. 이미 켜진 표식이었다. 따라가서 기체를 밀어도 점수는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카르덴을 후퇴시키고 왼쪽 C로 향할 넓은 경로를 택했다.
예솔은 좁은 안쪽에서 몸을 먼저 틀어 지름길을 만들었다. 관객석에서는 두 기체가 곧 한 점에서 만날 것처럼 보였다. 하린은 저벽 바깥을 크게 돌았다. 처음 몇 초는 예솔보다 뒤였다. 카르덴의 발이 돌아설 여유를 가진 순간부터 두 기체의 방향이 달라졌다. 오르덱스는 벽 끝에서 허리를 다시 틀어야 했고, 카르덴은 멈춤 없이 C 앞으로 들어갔다.
86초. 하린이 C를 밟았다.
2 대 1. 종료음까지 남은 몇 초 동안 카르덴은 선 안쪽에 두 발을 온전히 두고 멈췄다. 하린은 조종기에서 손을 떼기 전에 발의 위치를 확인했다. 심판이 손을 들었다. 라운드 2 대 1, 경기 2 대 1. 문하린 4강 진출.
예솔은 자기 기체를 꺼내며 웃지 않았다. 대신 재생 화면을 하린 쪽으로 돌렸다. “첫 라운드 A는 일부러 내줬어요. 그건 맞아요.”
“알았어요. 늦게.”
“세 번째엔 그 길 안 따라왔죠.”
“B에서 나올 자리가 없더라고요.”
예솔이 화면의 벽 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건 나도 못 봤어요.”
하린은 자기 케이스를 닫고 예솔의 말을 기억해 두었다. 이기는 쪽도 모든 길을 먼저 아는 건 아니었다. 둘은 상대에게 다음 라운드를 잘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화면을 끄고 각자 부품 검사를 마쳤다.
공방에 돌아온 밤, 하린은 첫 선의 주행 기록을 열었다. 주황색 선은 여전히 B 바깥으로 뻗어 있었다. 그 위에 오늘 세 번째 라운드의 선을 반투명하게 얹자, 둘은 같은 지점에서 잠시 갈라졌다. 한쪽은 표식에 가까웠고, 다른 쪽은 밖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린은 새 기록의 이름을 입력하지 못하고 한참 보았다. 결승이 가까워진다는 말보다, 내일도 자기가 틀린 길을 고를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수경이 꺼진 공방의 절반만 불을 켰다. “아직 있어?”
“다미 경기 보기 전에 카르덴 발만 다시 확인하려고요.”
“네가 오늘 이긴 기체?”
“네. 내일도 제가 똑같이 움직일지는 몰라서요.”
수경이 정비등을 하린 쪽으로 돌려 주었다. 하린은 카르덴의 양발을 같은 높이의 시험대에 올렸다. 눈앞에 놓인 다음 일은 승리의 기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수 있는 발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