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 날 아침, 하린은 카르덴을 케이스에서 꺼내 두 발로 세웠다. 첫날에는 받치던 손을 떼는 데 오래 걸렸는데, 이제 손은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그렇다고 오늘의 발이 어제처럼 움직일 거라 믿을 수는 없었다. 하린은 왼팔 잠금쇠를 당겨 보고, 오른발 패드를 눌렀다. 두 곳 모두 정상이었다.
다미는 맞은편에서 테르가드의 넓은 발을 바닥에 한 번 눌렀다. 그라벤은 두 번째 케이스에 있었다. 공방에서 서로의 기체를 만지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다만 어젯밤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다. 누구든 도울 수 있는 정비와, 결승에 들어가는 조종은 다른 일이었다.
“잘 잤어?” 하린이 물었다.
“응. 중간에 한 번 깼어.”
“나도.”
둘은 그 정도만 말하고 검사대로 갔다. 나후가 두 명의 등록 기체 네 대를 차례로 확인했다. 헬리안은 공방 소유, 하린의 대여 등록 기체였다. 대여 기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미의 그라벤 오른발에는 지난번과 같은 규격의 수리 부품이 잠겨 있었다. 검사표에 전부 정상 표시가 들어갔다.
경기대의 표식 A, B, C가 꺼진 것을 보자 하린은 첫 연습날의 화면을 떠올렸다. A를 먼저 밟고도 선 밖으로 나가 패했던 경기였다. 다미는 그때 코너 안쪽에서 길을 지켰다. 오늘도 다미가 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길은 아니었다. 둘은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선을 그렸다.
첫 라운드에는 카르덴과 테르가드가 나왔다. 하린은 출발 전에 B의 바깥쪽 안전 면을 훑었다. 다미는 중앙 A보다 왼쪽 C로 이어지는 넓은 바닥을 봤다. 시작 신호 뒤 카르덴이 먼저 앞으로 나갔다. 16초에 A가 하린의 색으로 켜졌다. 관객석에서 박수가 났지만 하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첫 점수만으로 라운드가 끝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미는 테르가드를 왼쪽 C로 보냈다. 하린이 뒤따라 갈까 했지만 중앙에서 몸을 돌리지 않았다. 44초에 다미가 C를 밟았다. 1 대 1. 오른쪽 B가 남았다. 하린은 코너의 안쪽 통로를 봤다. 그곳은 짧았고, 테르가드의 발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좁았다. 첫날이라면 그 짧음을 점수로 보았을 것이다.
하린은 카르덴을 한 번 뒤로 물렸다. 저벽 바깥을 돌아가는 동안 다미의 테르가드는 이미 코너 쪽으로 오고 있었다. 두 기체가 가까워졌을 때 하린은 먼저 몸을 틀지 않았다. 발 두 개가 들어갈 폭을 확보한 뒤 B를 향해 마지막 걸음을 놓았다. 74초. 하린이 B를 선점했다. 두 발은 선 안에 남았다. 다미는 테르가드를 멈추고 남은 길을 살폈지만 미점유 표식은 없었다. 첫 라운드 2 대 1, 하린 승.
“이번엔 돌아왔네.” 다미가 말했다.
“응.”
하린은 웃었다. 다미의 말은 1화의 실수를 놀리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장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이 그 변화도 본 것이다. 그래서 승리의 기쁨과 다음 라운드에 대한 두려움이 같이 왔다. 다미는 카르덴이 어떻게 돌아섰는지 이미 봤다.
두 번째 라운드에는 헬리안과 그라벤이 섰다. 하린은 낮은 벽을 넘는 각도를 확인했다. 다미는 그라벤의 서는 위치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기체를 공방에서 여러 번 만져 봤지만, 지금은 상대 조종기가 어디로 향할지 몰랐다.
출발 뒤 하린은 헬리안을 벽 앞에 세웠다. 점프 버튼을 눌렀다가 놓았다. 다미가 중앙 A를 향하는 길에 그라벤을 정확히 세웠다. 30초에 A가 다미의 색이 됐다. 하린은 늦게 벽을 넘기보다 바깥길로 B에 들어가 42초에 점수를 맞췄다. 한쪽씩 가져간 뒤의 긴 정적이 더 크게 들렸다.
C로 가는 길은 둘이었다. 헬리안이 한 번 뛰면 짧게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착지 뒤 멈출 자리에는 다미의 그라벤이 이미 몸을 맞추고 있었다. 하린은 6화에서 배운 대로 착지 바닥을 먼저 봤다. 점프를 포기하고 걸어가기로 했다. 다미는 그 결정도 읽었다. 그라벤을 C 입구에 오래 세워 두지 않고, 하린이 멀리 돌아가는 동안 조금씩 앞으로 옮겼다. 느린 기체의 각 걸음이 다음 정지 자리로 이어졌다.
82초. 다미가 C를 먼저 밟았다. 종료까지 헬리안이 따라붙었지만 이미 선점된 표식은 다시 점수를 주지 않았다. 다미가 2 대 1로 두 번째 라운드를 가져갔다. 경기 전적 1 대 1. 하린은 배터리 화면을 닫았다. 전력이 남아 있었다. 쓸 수 있는 힘과 쓸 수 있는 길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라운드에 하린은 카르덴을 골랐다. 다미는 그라벤을 한 번 더 세웠다. 세 번째에는 앞서 등록한 두 대 중 어느 하나를 다시 골라도 된다. 표식은 모두 다시 꺼졌고, 앞선 라운드의 득점은 여기로 넘어오지 않았다. 관객석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얼굴보다 기체를 더 많이 보고 있었다. 하린은 다미가 그라벤의 오른발을 눈으로 확인하는 걸 봤다. 다미도 하린이 경기면 바깥 폭을 한 번 훑는 걸 봤다.
“준비됐습니까?” 나후가 물었다.
두 사람은 각각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 카르덴이 오른쪽 B로 갔다. 하린은 진입 전에 한 번 멈추고 몸을 안쪽으로 틀었다. 발을 놓을 폭과 돌아올 폭이 모두 있었다. 21초에 B를 밟았다. 다미는 그라벤을 왼쪽 C에 세웠다. 36초에 점수가 같아졌다. 중앙 A만 꺼져 있었다.
하린은 A까지의 길을 훑었다. 안쪽으로 바로 들어가는 짧은 길이 보였다. 다미의 그라벤은 그 반대편에서 천천히 몸을 돌리고 있었다. 지금 들어가면 카르덴이 먼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표식을 밟은 뒤 그라벤과 저벽 사이에서 발을 빼야 했다. 각도는 첫 연습의 B보다 넓었지만, 시간은 그때보다 적게 남았다. 하린은 자기 손목 붕대 아래 맥박을 느꼈다.
조종기 화면에는 B의 경로가 남아 있었다. 방금은 멈추고 틀어서 점수를 얻었다. A로 가는 이번 길은 멈출 폭 없이 들어가야 가장 빨랐다. 늦게 고르면 다미에게 점수를 내준다. 빨리 고르면 다시 안전 면으로 나갈 수 있다. 하린은 그 둘을 하나의 질문으로 합치지 않았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분명했다. 발을 선 안에 남기고 싶은 마음도 분명했다.
카르덴이 안쪽 길을 향하다 멈췄다. 하린은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바깥을 돌아서 A로 가려면 몇 걸음 더 필요했다. 다미는 하린이 멈춘 순간을 보았다. 그라벤을 급히 밀지 않았다. 자기 기체가 A 앞에서 정확히 설 수 있는 짧은 구간을 먼저 잡았다. 하린이 저벽 끝을 지나는 동안 다미는 그라벤의 앞발을 목표선에 맞췄다. 관객석에서 두 기체가 동시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미는 이미 멈출 자리를 정해 둔 뒤였다.
88초. 그라벤이 중앙 A를 밟았다.
하린은 카르덴을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 표식은 다미의 색이었다. 짧은 종료음 뒤 화면에는 다미 2, 하린 1이 떴다. 후면 태그는 없었다. 장외도 없었다. 심판이 결과를 확인했다. 결승 경기 전적 2 대 1, 서다미 우승.
다미는 그라벤을 바로 들어 올리지 못했다. 손에서 조종기를 놓고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음을 알았다. 하린은 카르덴의 발을 확인했다. 두 발 모두 선 안이었다. 졌는데도 그 모습이 눈에 오래 남았다. 첫 연습날 발 하나를 안전 면에 둔 채 화면을 올려다보던 자신과는 다른 자리였다.
“내가 멈춘 거 봤지?” 하린이 물었다.
“응. 그래서 나도 더 안 밀었어.”
“A까지는 네가 먼저였어.”
다미가 조금 늦게 웃었다. “오늘은 그랬어.”
둘은 승패를 서로에게 돌리지 않았다. 하린이 좁은 길을 포기했기 때문에 다미가 우연히 이긴 것도 아니었다. 다미는 자신이 고른 자리에서 정확히 멈췄고, 하린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길을 거절했다. 그 선택들이 같은 라운드에서 만나 승부가 났다.
시상대에서 다미는 메달보다 검사표를 먼저 챙겼다. 경기 중 수리는 없었고 세 라운드 뒤에도 오른발 연결부는 정상이었다. 수경이 “오늘은 내가 써 줄까?” 하고 물었을 때 다미는 펜을 들었다.
“제가 쓸게요.”
그녀는 장학 신청서의 경기 기록에 세 라운드의 기체와 표식 순서, 마지막 A에서 발을 멈춘 위치를 적었다. 우승했다고 지원이 자동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출할 자료를 자신이 썼다는 것이 먼저였다. 하린은 자기 기록에 결승 3라운드의 멈춘 위치를 저장했다. 이름을 붙이려다 한 번 손을 뗐다. 남에게 보여 주기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기록은 지우지 않았다.
다음 날 공방은 평소처럼 문을 열었다. 시연기 세 대가 선반에 있었고 헬리안의 대여 케이스는 아직 하린의 작업대 옆에 있었다. 반환일까지 며칠 남아 있었다. 수경이 오전 의뢰를 분류하는 동안 다미는 테르가드의 발 패드를 닦았다. 하린은 카르덴을 경기대에 세웠다.
“어제 그 길 다시 해 볼래?” 다미가 물었다.
“어느 길?”
“네가 들어가다 멈춘 데.”
하린은 경기면을 봤다. 중앙 A와 저벽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틈이 있었다. 어제는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던 길이었다. 오늘은 점수도 심판도 없었다. 그래서 쉬운 길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이번엔 나가는 쪽부터 볼게.”
다미가 그라벤을 반대편에 세웠다. “그럼 나는 네가 어디서 멈추는지 볼게.”
두 기체의 센서 눈이 켜졌다. 하린은 조종기의 엄지를 올리고, 먼저 뒤로 빠질 수 있는 자리를 확인했다. 다미는 자기 발을 세울 곳을 골랐다. 수경이 공방 문을 열자 바닷바람이 들어왔다. 빈 경기면에서 새 경로를 그릴 시간이 시작됐다.